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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한국대학가’의 『학사 어깨』이민휘.

MorningNews 0 3,235 2020.03.04 09:16

책(冊)과 만남, 사람(人)과 만남, 소석. 정지원   


1950년대 ‘한국대학가’의 『학사 어깨』이민휘.  

누가 뭐래도 이시대의 협객이고 풍운아  

미주땅에 『코리아드림』 심고 가꾼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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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휘 일대기 『외길』의 주인공 李敏輝 회장. 193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상해 임정 창설요원이며 2대 국회의원인 독립지사 李奎甲 선생의 아들이다. 

경기고(1952년) 연세대(정외과 입•퇴학)을 거쳐 동국대(1956년 정치외교학과 졸업). 미국 산호세대학(1959년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1969년 미국이민. 1971년 샌프란시스코 교민회 7대 회장. 1974년 샌프란시스코 한인회 9대 회장. 1974년 전국체전 재미동포 선수단 단장. 남가주 한인회 12대 회장. 1982년 LA한인회장. 1990년 재미대한체육회 56대 회장. 1991년 재미대한체육회 7대 회장. 1995년 미주한인회 총연 16대 회장. 1997년 미주총연 17대 회장. 2006년 미주동포후원재단 초대 이사장. 2012년 미주동포후원재단 명예 이사장. 등다채롭다. ]


이민휘 일대기를 소개하면서 『외길』책 292페이지에 실려있는 미주한국일보 전 편집국장을 역임한 최재웅씨의 단평. 『올드타이머 이민휘』라는 글 중 일부를 적으면→풀무처럼 단내를 풍기며 『비상』과 『추락』을 거듭해온 전 미주한인회 총연합회 총회장 이민휘씨. 1950년대 한국대학가를 휩쓸었던 『학사 어깨』이민휘씨. 한밤중에 서울시내에서 기관총을 난사했던 태권도 6단의 열혈아이자, 주먹 보스였던 그는 누가 뭐래도 이 시대의 협객이고 풍운아다. 
개미굴 같은 현대사의 한구석을 헤쳐오면서 이 사람만큼 말썽도 많았고 오해 많이 받고 뚝심 있는 사람도 드물다. 항일투사의 핏줄이라는 단단한 자부심과 유년시절의 방황, 장년이 되기까지 온갖 핏박을 감내하면서 그는 『7전 8기』했고 한인사회의 통념을 깨고 자성의 늪에서 거듭 태어난 것이다. 
생일아침. 아침밥을 굶어야 했던 그의 어린시절은 문턱이 닳게 드나들었던 일본형사의 닥달 속에서 가슴에 상처를 입었고 『불령선인』의 슬픔을 간직해야 했다.(중략). 돌아보면 아득하기만 한 유학시절, 산호세 언덕의 뜨거운 깡통공장에서 『고향생각』을 합창하며 고국땅을 다시 밟은지 10년만에 두번째 태평양을 건넜다. 
미주땅에 『코리아드림』을 심고 가꾸려던 이민휘씨. 그러나 그는 『김대중 연설 방해사건』, 『한인회 선거파동』, 『외회밀반출사건』과 『코리안 갱 커넥션』등 가는 곳 마다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온갖 중상모략--- 공갈협박--- 때로는 사생활까지 유린당하면서도 그는 끝내 좌절하지 않고 꼿꼿하게 일어선 것이다. 
그는 압지가 잉크를 빨아 들이 듯, 끊임없이 자신의 기록을 갱신해 나가는 마라토너처럼, 그는 『해야 할 일은 많고 해온 일은 별로 없는 한인 사회』에 『공』과 『사』의 양날개를 두루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이상 이민휘 회장의 인물 됨됨이를 요약했다). 아버지 이규갑의 죽음 1970년 3월. 이민 온지 6개월만이었다. 
여든 세살의 아버지가 별세했다. 서울행 비행기편을 알아봤지만, 장례식 날에 맞춰갈 비행기편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이 아버지의 장례는 『사회장』이어서 7일간의 여유가 있었다. 3월 20일 『운호 독립지사 이규갑 선생 사회장』 영결식이 있었다. 곽상훈 사회장 위원장. 숭의여고 합창단의 조가. 정일권 국무총리의 조사. 윤치영 공화당 의장. 흥사단 장리욱 박사 등등 여러 인사들이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삶을 뜻있게 살아라』라는 아버지의 평소 말씀을 지금도 실행하고 있다고 이민휘 회장은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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