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冊)과 만남, 사람(人)과 만남, 소석. 정지원
7대 회장때 『한인록』발간. 1천세대 개인별 주소록
고 장인환 의사 서울 국립묘지 봉환
9대 회장선거. 3파전(이민휘•최명배•김용백)
[ 『이민휘 일대기』에서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의 문헌적 자료를 간과할 수 없다.
예를 들면 1971년 11월 26일 교민회 임시총회에서 6대 정선희 회장단의 총사퇴가 재적 132명중 82대 12로 수락됐고 회장후보가 된 이민휘씨는 81표를 얻어 제 7대 교민회장으로 선출됐다.
1974년 2월 24일 제 9대 한인회장 선거때는 총 투표수 4백 10표를 얻은 최명배씨를 불과 29표차로 회장에 당선됐다.
그때 김용백씨는 2백 54표를 얻었다.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장 선거 역사상 3파전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보다 앞서 8대 회장은 문충환씨(그 당시 호텔 매니저)가 선출됐다. ]
샌프란시스코 한인회 7대 회장에 선출된 이민휘 회장때 처음으로 『한인록』을 제작, 발간, 배부했다. 회장 임기동안 첫번째는 ‘교민 회관’ 건립이었다.
앞에 말한 주소록 발간은 교민회 역사상 최초였다.
1천세대 개인 주소별 및 전화번호부와 공공기관 그리고 각 업소별을 담았다.
그 당시 샌프란시스코 곳곳에 사는 모든 동포들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수집하는 것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모든 임원이 똘똘 뭉쳐 수고했다.
부회장은 한병일. 9개부처 임원은 총무부장•이중재, 공보부장•전영길, 섭외부장•손화규, 재무부장•이병양, 교육부장•염수일, 서기•전영덕, 친교부장•권도일, 문화부장•이기복, 부녀부장•박규화, 재정감사•김종규, 이유서 였다.(경칭생략).
9대 회장때 빼놓을 수 없는 업적 중 하나는 애국지사 고 장인환 의사 국립묘지 봉환 이다.(1975년 8월 8일)사이프러스 콜마 공동 묘지에 작은 묘비에 찬송가를 펼쳐 놓은 듯한 장식이 있었고 그 아래 ‘장인환/1876년 출생/1930년 별세’라고 새겨진 짤막한 글이 세월의 풍상에 씻겨 겨우 알아볼 정도로 남아 있었다.
그 초라한 묘비가 늘 맘에 걸려 7대 회장이 되면서 묘비 동판을 새로 만들었다.
9대 회장을 맡으면서 ‘고 장인환 의사의 서울 국립묘지 천장’을 본격 추진했다.
장인환 의사의 국립묘지 천장은 장 의사의 생전 친구인 양주은, 김동우 옹의 평생 소원이었다.
장 의사 유해 국립묘지 이장을 위해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원호처는 물론, 청와대를 찾았다.
장 의사 유해 국립묘지 이장 건은 정식으로 국무회의에 상정 통과됐다.
1975년 8월 2일 장 의사의 유해는 샌프란시스코 연합감리교회에서 추념예배가 있었고( 천장위원장•송정률 목사)8월 3일 LA를 경유 대한항공편으로 8월 4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실로 장인환 의사 사후 45년만에 유해는 독립문을 돌아 중앙청을 거쳐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봉안됐다.
그 당시 유근창 원호처장과 안춘생 광복회장이 김포공항에 영접 나왔다.
육•해•공군 의장대와 헌병들이 유해를 모셨고 유근창 원호처장 헌화. 이효상 국회의장이 분향을 올렸다.
그 밖에 원로시인 이은상 선생을 비롯, 많은 애국시민들이 고 장인환 의사의 넋을 위로했다.
유해를 묻는 첫 삽은 원호처장과 이민휘 회장이 함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