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처럼

해초 0 1,498 2020.08.25 14:43
산사(山寺)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風磬)이란 것이 있습니다. 풍경이 흔들릴 때마다 들리는 은은한 소리가 때론 우리의 메마른 마음에 울림이 되어, 평안과 위로를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풍경이 내는 소리,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요? 분명 종처럼 생긴 풍경이 소리를 만들어 냅니다. 공명할 수 있는 공간과 부딪쳐 울릴 수 있는 추가 마찰음을 내면서 은은한 소리가 나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만을 열거한 것일 뿐입니다. 보이지 않으나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아니면 아무리 외형상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해도 결코 풍경은 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3장은 그 바람을 다른 말로 성령에 비유한 바 있습니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모르는 신비한 영. 그것은 우리의 눈으로 드러나는 삶의 여러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나눔을 통해서 나타나기도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싸우는 정의의 실현에서도 드러납니다. 하지만 대놓고 요란 법석을 떠는 법이 없습니다. 그저 은은하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듯, 조용히 스쳐 지날 뿐이지요. 예수의 가르침처럼 오른 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듯 말입니다. 요즘처럼 온 감각이 날카롭게 선 시대에, 목청을 돋우며 떠드는 교회 보다 풍경처럼 성령이 전하는 은은한 소리를 내는 교회를 기대하는 것은 저 만의 욕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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