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사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태평성대를 이룬 것으로 알려진 요나라의 왕이 자신의 권좌를 당시에 학문과 덕을 두루 갖춘 허유라는 신하에게 물려주려고 이렇게 제안합니다. “당신이 즉위하면 천하를 잘 다스릴 텐데 제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능력이 부족하니 천하를 받아 주십시오.” 그러자 허유는 “임금께서 천하를 잘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가 대신한다면 그것은 명예욕 때문일 것입니다. 새가 둥지를 틀 때 쓰이는 것은 숲 속의 많은 나무 중에서 단 한 가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람도 제 분수를 알고 만족하며 살아야 합니다”라며 거절 했다는 것입니다. 이 때 새가 둥지를 틀 때 숲 속의 나무 중 단 하나의 가지만 필요로 한다는 말의 사자성어가 소림일지(巢林一枝)입니다.
작은 것에도 만족하며 살라는 말은 오해를 살 수도 있습니다. 자칫 큰 것에 대한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특정한 이들에게는 자기 정당화를 위한 논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의 논리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구별 방식과는 다른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해 주신 것이지요. 높아지려고 만 하는 세상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낮아짐의 가치를 일러 주신 것입니다. 세상의 방식대로 꿈틀대는 욕망을 쫓아 살다가 어느 날 모든 것이 자신을 버린 것 같은 그 순간에, 여전히 자신을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작은 가지 하나가 있다면. 그래서 작은 행복감을 되찾을 수 있다면 어떨까요? 새로운 시선이 열리는 것을 느낄게 될 지도 모릅니다. 함께 내 인생의 여정을 걸어 온 사람들이 더 이상 경쟁자가 아니라 동반자로 느껴지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지쳐 보이는 이들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건네는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놀라운 건 그 때야 비로소 흐릿한 이미지로만 남은 하나님의 나라도 조금 더 선명하게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란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