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자기 신앙

해초 0 100 08.28 06:51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기는 하지만, 오래 전 물자가 부족하던 때에 책가방이 아닌 보자기에 책을 싸서 어깨에 졸라 메고 학교를 다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흔히 “책보”라고 불리던 것이었지요. 늘 네모난 책과 필통을 싸 놓아서 그런지, 사람들은 아직도 책보의 생김새를 네모나게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책보를 싼 보자기의 모양은 다 제 각각입니다. 본래 보자기의 모양과 상관없이 그것으로 무엇을 싸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지는 것 뿐입니다. 떡을 싸면 떡 모양을 한 ‘떡보자기’가 되고, 옷을 싸면 둥그스름한 ‘옷보자기’가  됩니다. 예전에는 다방 같은 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보자기를 손에 들고 성급히 길을 가던 모습들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확인하지 않더라도 보자기의 모양을 보고 한 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싸맨 보자기이든 그것을 푸는 순간 원래의 모양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보자기의 성질입니다.

내용물에 따라 보자기는 생김새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게의 체감도 달라지게 합니다.  요즘도 한국 법원에서는 재판 관련 서류들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법복을 입은 판사나 검사의 손에 들린 보자기는 실제 무게와 상관없이 보는 이들에게 중압감을 주지요. 언젠가 장례식에서 유골함을 보자기에 싸서 건네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 때 느낀 무게는 실제의 중량 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던 기억이 납니다. 보자기에 싸인 것은 화장하고 남은 뼛가루만이 아니라 실은 묵직했던 삶의 기억도 함께여서 그랬는지 모릅니다. 내용물에 따라 달라보이는 보자기라도, 변하지 않는 한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싸맬 수 있는 유연성과 포용성입니다. 작은 구슬 뭉치에서부터 파마하고 난 여자의 머리 그리고  커다란 자동차까지 크기만 된다면 보자기로 싸지 못할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내용물에 따라 모양이 변하고 무게감이 달라진다는 것은 그 만큼 보자기가 가진 유연함과 포용력이 크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닮아가야 할 신앙의 모습을 “보자기 신앙”이라고 명명해도 이상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비록 신앙의 모습과 형식은 달라도, 그리고 이에 따라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체감이 달라진다 해도 그 모든 것을 유연하게 포용할 수 있는 신앙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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