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의 문제점 중 하나로 선량한 방관자를 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일들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행여라도 자신에게 불이익이 올지를 두려워하여 회피하는 방관자 유형이 늘고 있다는 사실은 공동체 전체로 볼 때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사회적 불의에 대한 침묵이 커질수록 세상은 빛보다 어둠이 지배할 가능성이 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영국 작가인 올리버 골드스미스는 불의에 대한 방관을 가리켜, “침묵은 동의”를 의미하는 것이라 말한 바 있습니다. 나아가 그는 침묵하는 사람도 공범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도 “사회적 전환기에서 최대의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이라는 말을 남겼지요.
침묵이 언제나 금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지난 1964년 3월 어느 날 새벽, 뉴욕의 한 주택가에서 노상강도로 보이는 남자가 지나가던 여자를 흉기로 찌른 사건이 있었습니다. 약 30여분 동안 여자는 격렬히 저항하며 소리 높여 도움을 청해 보았지만, 주변의 그 누구도 도움을 주지 않아 결국 안타깝게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미국을 충격 속에 몰아넣은 이 사건은 후에 피해자의 이름을 따 “키티 제노비스(Kitty Genovese) 신드롬”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달리(Daley)와 라타인(Latane)의 심리 실험은 이 사건의 핵심을 “방관자 효과 (Bystander Effect)”에서 찾았습니다. 군집한 인원이 많을수록 사람들은 ‘누군가 대신 하겠지’ 라며 책임을 회피하려 든다는 것이지요. 반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무관심과 무책임이 만연한 시대일수록 교회가 위기가 아닌 증인이 될 기회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