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안에 있지 않은 때

해초 0 15 10.09 13:06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이 사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오직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이라고 주장합니다. <존재와 시간>이라는 저작에서, 하이데거는 친숙함이 사라져 낯선 상황에 직면할 때, 인간의 생각은 시작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생각하도록 만드는 이 낯선 상황을 ‘손안에 있지 않은 때’라고 불렀습니다. 자기 손을 벗어난 낯선 상황이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이끈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모든 것이 너무나 친숙해서 특별히 ‘손안에 있지 않은’ 게 없는 권태로운 부부관계를 상상해 보세요. 일상적 대화나 행동도 생각없이 이루어질 만큼 매우 습관적인 관계 말이지요. 그런데 상대방이 갑자기 평소에 하지 않던 낯선 행동이나 말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어느 여 권사님이 무뚝뚝해서 평소엔 말 한마디도 하지 않던 남편이 갑자기 길을 가다 손을 잡으려 하기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사람 살려”라고 소리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부부는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돌아보며 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된 것이지요. 도종환의 시 가운데 “가구” 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너무나 익숙해져서 이제는 서로 무관심해져 버린 부부 관계를 집안의 가구에 비유한 시입니다. 무심코 지나쳐 버릴 만큼 서로가 그저 집안 어딘가에 있을 법한 가구처럼 느껴지는 관계. 생각만 해도 불행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럴 때, 낯설게 내미는 남편의 손이나 평소와는 다른 아내의 위로의 말 한마디도 서로의 존재를 달리 만드는 커다란 힘이 됩니다. 말하자면, ‘손안에 있지 않은 때’가 일상에 지쳐가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것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손안에 있지 않은 그 순간에 신앙의 진정한 힘도 나타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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