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기도(1)

홍삼열 0 2,576 2019.05.07 12:08

한때 ‘중보기도’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중보기도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중보자로서 기도해주시는 형태인데 어찌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을 중보기도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모데전서 2:5). 중보자(中保者)는 글자 그대로 ‘중간에서 돕는 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의 중간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주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이런 중보의 사역은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 한 분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중보’라는 단어를 다른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다.

 

그러면 남을 위한 기도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어떤 사람은 이 기도를 그냥 남을 위한 기도”라고 하든지 아니면 디모데전서 2 1절에 나오는도고”(禱告)로 불러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런데 이도고”(ντεύξεις)라는 단어는 개역성경에서만 딱 한 번 사용되고 있고 다른 성경번역본들에서는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새번역은 이것을중보기도”로, 공동번역은 “간청”으로 번역하고 있고,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이것을 intercession(중재)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만큼 도고라는 단어는 아주 생소하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고 한국어사전에도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도고로 번역한 그리스어 enteukseis의 의미는 단순히 “기도”이지 “누군가를 위한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남을 위한 기도를 도고로 부르는 것도 무리가 있다. 그래서 “남을 위한 기도”라는 긴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한 현재로서는 그것을 대체할 적당한 용어가 없기 때문에 그냥 현재와 같이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우리가 그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예수님처럼 중보자로 기도한다는 의미는 아니고, 단지 부차적인 의미 혹은 비유적인 의미에서 남을 위해 하나님께 대신 간청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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